홍대 골목의 한 삼겹살집. 불판 위에서 비계가 지글거린다. 집게를 든 사람은 LG 구광모 회장이다. 비계를 손질하고, 소맥을 말고, 고기를 뒤집는다. 그 옆에서 젠슨 황은 깻잎에 고기 한 점을 싸서 입에 넣는다. 네이버 이해진 의장은 상추쌈 싸는 법을 시범 보인다. 최태원 회장은 SK하이닉스가 만든 ‘HBM 칩스’라는 과자를 꺼내 권한다. 소맥잔이 부딪친다. 가게 이름은 ‘형님 저요’다.
지난 6월 5일 저녁, 세계에서 가장 비싼 회사의 최고경영자와 한국 재계 총수들이 홍대 삼겹살집에 둘러앉았다. 이른바 ‘삼소 회동’. 삼겹살과 소주를 줄인 말이다. 작년 10월에는 강남 깐부치킨에서 치킨을 먹었다. 그때는 이재용·정의선 회장이었고 이름은 ‘깐부 회동’이었다. 깐부에서 형님으로. 치킨에서 삼겹살로.
온 나라가 이 장면에 환호했다. 글로벌 빅테크의 거물이 호텔 코스가 아니라 동네 삼겹살집에 앉아 소맥을 마시는 모습. 며칠간 모든 매체가 이 식탁을 중계했다. 누가 고기를 구웠고, 누가 계산을 했고, 젠슨 황이 어떤 쌈을 싸 먹었는지까지. 회동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가게 밖으로 나와 시민들에게 과자를 나눠 주었다. HBM 모양으로 만든 과자였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반도체를 본떠 만든 군것질거리가 홍대 거리에 뿌려졌다. 그런데 그 많은 기사 어디에도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날 불판 위에 올라간 삼겹살이 한돈이었는지, 수입이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1. 왜 하필 삼겹살이었나?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그날의 메뉴와 장소는 엔비디아가 골랐다는 점이다. 한국 측이 모신 자리가 아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가 한국 재계 총수를 만나는 자리에 직접 삼겹살집을 지정했다. 이건 그냥 끼니가 아니다. 메시지다. 협상 테이블의 메뉴는 관계의 선언이다. 격식을 차리고 거리를 두려면 호텔 다이닝룸에 흰 식탁보를 깐다. 코스 요리가 나오고 직원이 접시를 내려놓고 물러난다. 그 식탁에서는 누구도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는다. 거기 앉은 사람들은 동등하지 않다. 대접하는 자와 대접받는 자가 나뉜다.
삼겹살집은 정반대다. 불판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는다. 누군가는 고기를 굽고, 누군가는 가위질하고, 누군가는 쌈을 싼다. 손에 기름이 묻고 옷에 냄새가 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 집게를 들기도 한다. 그날 가장 어린 구광모 회장이 고기를 구운 것이 화제가 된 이유가 그것이다. 삼겹살 불판 앞에서는 위계가 흐려진다. 누가 굽고 누가 받아먹느냐가 그 자리의 친밀도를 보여 준다.
엔비디아는 그걸 읽었다. 한국에서 삼겹살이 무엇을 뜻하는지. 삼겹살은 음식이기 전에 관계의 언어다. 격의 없음, 친밀함, 수평. “우리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는 말은 메뉴를 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이를 정하는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코스 요리를 먹을 수는 있어도, 불판 앞에 마주 앉아 서로 고기를 구워 주는 사이는 아무하고나 되지 않는다.
작년의 깐부, 올해의 형님. 두 번 다 친밀한 사이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외국 기업이 한국식 친밀의 기호를 정확히 골라 썼다. 깐부치킨이라는 상호, ‘형님 저요’라는 상호. 그 안에 담긴 정서를 정확히 계산했다. 삼겹살이 그 기호의 한복판에 있었다.
대비는 한층 더 선명하다. 그 식탁에 오른 두 가지를 보라. 한쪽에는 HBM 칩스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첨단인 반도체를 본뜬 과자다. 다른 한쪽에는 삼겹살이 있었다. 사람이 불을 다룬 이래 가장 오래된 방식 그대로, 고기를 불판에 올려 굽는 음식이다. 가장 첨단의 상징과 가장 아날로그한 음식이 같은 식탁에 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HBM 칩스가 아니라 지글거리는 삼겹살이었다.
여기까지는 흐뭇한 이야기다. 한국의 서민 음식이 세계 자본의 한복판에서 외교의 언어가 되었다. 삼겹살은 이제는 그냥 고기가 아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 자산이다. 국격이라는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미트마케터의 눈으로 보면, 바로 그 지점에서 불편한 질문이 시작된다.
2. 한국인에게 삼겹살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풀기 전에 삼겹살이 왜 이 자리까지 왔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삼겹살은 한국인에게 그냥 좋아하는 고기 부위 하나가 아니다. 한국인 한 사람이 1년에 먹는 돼지고기 가운데 삼겹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수준이다. 같은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등심, 안심, 앞다리, 뒷다리가 다 있는데도 유독 삼겹살이다. 다른 나라에서 삼겹살은 베이컨이나 만들어 먹는 흔한 뱃살일 뿐이다. 한국에서만 삼겹살이 왕좌에 앉는다.
이 유별난 사랑에는 뿌리가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이 거기 배어 있다. 고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가장 싸고 든든하게 기름기와 단백질을 채울 수 있는 음식, 여럿이 불판 하나에 둘러앉아 잔을 나눌 수 있는 음식이다. 삼겹살은 그렇게 노동의 음식이자 회식의 음식, 위로의 음식이 되었다. 한국인이 삼겹살에서 느끼는 것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그 모든 기억이다.
그러니 삼겹살은 한국 사회의 정서 자산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문화의 무게가 거기 실려 있다. 엔비디아가 이 무게를 정확히 짚어 식탁에 올린 것이고, 그래서 그 장면이 그토록 강하게 먹혔다. 문제는 이 정서 자산이 한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3. 음식은 박수받았고, 돼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묻는다. 그 삼겹살은 누구의 삼겹살이었나. 이건 트집이 아니다. 산업을 30년 들여다본 사람에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다. 식육 마케팅을 한평생 해 왔고, 외식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메뉴를 짜 본 경험까지 더해 보면, 식탁 위 고기를 볼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그 고기의 출신이다. 그날 불판 위 삼겹살이 한돈이었기를 바란다. 글로벌 CEO가 한국 총수들과 한국 삼겹살을 구웠다면 그보다 좋은 그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보도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도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글이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우리는 음식을 보았지 돼지를 보지 않았다.
대중은 삼겹살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삼겹살을 만든 돼지가 어디서 자란 어떤 돼지인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삼겹살이라는 음식의 이름값은 하늘을 찌르는데, 그 음식을 떠받치는 한돈이라는 산업은 익명이다. 음식은 유명하고 생산은 보이지 않는다. 음식과 생산이 분리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기사들이 챙긴 디테일이 무엇이었는지가 이 분리를 그대로 보여 준다. 누가 고기를 구웠는지, 무슨 쌈을 쌌는지, 계산을 어떻게 했는지는 다 적혔다. 안면인식으로 결제했다는 것까지 적혔다. 정작 그 고기가 어느 돼지였는지만 비어 있다. 우리 눈은 식탁 위 사람과 결제 방식까지 보면서, 불판 위 고기의 국적은 그냥 지나친다. 이 분리가 한돈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다.
4. 소는 ‘한우’로 팔리고, 돼지는 ‘삼겹살’로 팔린다.
같은 고기인데 소와 돼지는 팔리는 방식이 정반대다. 이 차이를 보면 한돈이 왜 이토록 수입에 취약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한우 먹으러 가자”고 한다. 음식을 부르는 말 자체에 생산자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한우 등심, 한우 갈비, 한우 국밥. 부위나 요리 앞에 언제나 ‘한우’가 먼저 붙는다. 생산이 음식을 이끈다. 그래서 소비자는 소고기를 먹을 때 자연스럽게 그 소가 한우인지 수입인지를 의식한다. ‘한우’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방어막이 된다. 수입 소고기는 아무리 싸도 ‘한우’라는 이름값을 넘볼 수 없다.
돼지는 거꾸로다. 사람들은 “삼겹살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 말에 돼지의 출신은 없다. ‘한돈 삼겹살’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냥 삼겹살이다. 음식의 이름이 생산자의 이름을 덮어 버렸다. 부위가 품종을 이겼다. 그 결과 한돈이든, 수입이든, 불판에 오르면 똑같이 ‘삼겹살’이 된다. 이름이 같으니 가를 기준은 값밖에 남지 않는다.
여기에 한돈의 비극이 있다. 소는 음식 이름이 생산자를 끌어 주는데, 돼지는 음식 이름이 생산자를 가린다. 한우는 이름으로 수입을 막아 내는데, 삼겹살은 이름으로 수입을 끌어들인다. 같은 이름표 아래 수입이 들어와 한돈의 자리를 빼앗는다. 젠슨 황의 식탁에서도 그랬다. 그 자리는 ‘삼겹살 회동’이었지 ‘한돈 회동’이 아니었다. 음식은 주인공이 되었는데 그 음식을 만든 돼지는 끝내 이름조차 불리지 못했다.
5. 삼겹살이 국격이 된 그 시간, 한돈은 벼랑에 섰다.
숫자를 보자. 올해 들어 국산 삼겹살은 100g당 2,600원을 넘어섰다. 가축 전염병이 돌고 사료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유통업계는 40% 더 싼 수입산을 매대 앞에 내세웠다. 어느 대형마트는 수입 삼겹살을 100g당 990원에 팔았다. 한돈 2,600원, 수입 990원. 소비자가 어느 쪽으로 손을 뻗을지는 계산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올해 1분기 돼지고기 수입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31% 넘게 늘었다. 올해 전체 수입액은 사상 최대를 갈아치울 전망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자급률의 마지노선으로 여겨 온 70%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돈다.
여기에 더 근본적인 구조가 깔려 있다. 돼지는 복합유기생산체다. 한 마리를 잡으면 삼겹살만 나오는 게 아니라 등심, 안심, 앞다리, 뒷다리, 갈비가 한꺼번에 나온다. 어느 한 부위만 골라 더 만들 방법은 없다. 삼겹살 수요가 치솟아도 삼겹살만 따로 키울 수 없고, 뒷다리가 모자라도 뒷다리만 더 찍어 낼 수 없다. 돼지 한 마리는 모든 부위를 한 몸에 달고 태어나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진다. 이것이 축산물이 공산품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그래서 한 부위에만 쏠리는 소비는 복합유기생산체 전체의 균형을 흔든다. 한국인의 삼겹살 편식이 바로 그 사례다. 그런데 그 편식의 양상마저 고물가 앞에서 뒤틀린다. 지금은 비싼 삼겹살 구이 소비가 위축되면서 국산 삼겹살 재고가 쌓이지만, 값싼 뒷다리는 가공과 외식 수요가 몰려 오히려 모자라다. 한 몸에서 나온 부위들이 저마다 다른 시장 사정에 휘둘려 따로 논다. 복합유기생산체를 한 부위씩 떼어내 가격표만 들여다보는 한, 이 엇박자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균형이 깨진 틈을 값싼 수입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비싼 한돈 삼겹살이 주춤한 사이 수입 삼겹살이 매대를 채우고, 한돈은 자기 간판 부위에서마저 자리를 내준다.
이 그림을 겹쳐 보자. 한쪽에서는 삼겹살이 글로벌 거물의 외교 메뉴로 격상되어 국격이 되었다는 환호가 터진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삼겹살의 원료를 대는 한돈농가가 수입산에 시장을 내주며 벼랑으로 밀린다. 같은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다. 삼겹살이라는 음식은 이긴다. 한돈이라는 산업은 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소비자가 삼겹살을 살 때 사는 것은 ‘삼겹살’이지 ‘한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삼겹살은 불판 위에서 노릇하게 익는 그 맛, 소주 한잔과 어울리는 그 분위기다. 그 맛과 분위기는 수입 삼겹살로도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다. 990원짜리로도 불판은 지글거린다. 소비자가 삼겹살에서 산 것이 ‘경험’뿐이라면, 그 경험을 더 싸게 주는 쪽이 이긴다. 여기서 한돈이 무너지는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가격이 아니다. 한돈이 자기 이름으로 팔리지 못하고 ‘삼겹살’이라는 음식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6. 식당에 가면 한돈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이 분리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외식 현장이다. 손님이 삼겹살집에 들어가 “삼겹살 2인분” 하고 주문한다. 그 한마디에 돼지의 국적은 들어 있지 않다. 손님은 메뉴판에 적힌 원산지를 잘 읽지 않는다. 작은 글씨로 ‘국내산’ 또는 ‘수입산’이라고 적혀 있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불판에 올라 노릇하게 익고 나면 한돈인지 수입인지 맛으로 가려내는 손님은 거의 없다. 그래서 식당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 정해져 있다. 원가가 절반인 수입을 쓰는 것이다. 손님이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굳이 비싼 한돈을 쓸 이유가 사라진다. 양심 있는 식당이 한돈을 고집해도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진다. 시장은 결국 싼 쪽으로 기운다.
이것이 미트리터러시, 곧 고기 이해력이 무너졌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소비자가 고기를 읽어 내지 못하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좋은 고기를 만드는 쪽으로 돌아간다. 정직하게 잘 키운 한돈이 익명의 삼겹살에 묻혀 제값을 못 받는다. 반대로 출처 모를 수입 냉동육이 같은 ‘삼겹살’이라는 이름을 달고 같은 불판에 오른다. 이름이 같으니 값으로만 갈린다.

7. 한돈은 가격이 아니라 무엇으로 팔 것인가?
가격 싸움에서 한돈은 이길 수 없다. 사료값과 방역비, 좁은 국토에서 키우는 비용 구조상, 한돈이 수입산보다 싸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러니 가격으로 붙는 한 한돈은 계속 진다. 이건 냉정하게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이길 수 있는 자리는 따로 있다. 음식과 생산을 다시 잇는 자리다.
젠슨 황의 식탁이 역설적으로 그 길을 가리킨다. 삼겹살은 이미 단순한 단백질이 아니다. 친밀의 언어이고,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이고, 세계가 알아보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가. 한돈이어야 한다.
삼겹살이라는 음식이 문화 자산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자산의 정당한 상속자는 그 삼겹살을 길러 온 한돈이다. 990원짜리 수입 냉동 삼겹살이 아니다. 이 상속을 주장하지 못하면 한돈은 자기가 만든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채 가격표 경쟁만 하다 끝난다.
한돈이 가진 무기는 분명히 있다. 수입 삼겹살은 대부분 얼었다 녹은 냉동육이다. 한돈은 도축에서 식탁까지의 거리가 짧아 신선한 상태로 갈 수 있다. 같은 삼겹살이라도 신선육과 해동육은 육즙과 식감에서 갈린다. 여기에 숙성이라는 기술이 더해지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 알맞게 숙성한 고기는 풍미가 깊어지고 식감이 부드러워진다. 이건 가격으로 살 수 없는 가치다. 문제는 이 차이를 소비자가 읽어 낼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삼겹살이라는 음식의 이름값을 한돈이라는 생산의 이름값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소비자가 삼겹살을 살 때 ‘어느 돼지인가’를 묻게 만드는 일이다. 그 질문을 하는 소비자가 늘수록 한돈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로 팔린다.
이것이 미트리터러시의 문제다. 소비자가 한돈과 수입의 차이를,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선육과 냉동육의 차이, 좋은 사육과 그렇지 않은 사육의 차이, 숙성이 만들어 내는 풍미의 차이를 읽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이해력이 없으면 소비자는 영원히 가격표만 본다. 990원과 2,600원 사이에서 990원을 고를 뿐이다.
한돈산업이 진짜로 싸워야 할 전선은 가격표 매대가 아니라 소비자의 이해력이다. 마케팅으로 한때 매출은 낼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가 한돈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매출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해 위에 선 선택만이 가격 경쟁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조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 농가가 무엇을 알릴 것인가, 식당이 무엇을 내세울 것인가. 그 모든 답이 이 전선 위에 있다.
8. 다음에 글로벌 CEO가 삼겹살을 구울 때
젠슨 황은 떠났다. 삼소 회동은 며칠 짜리 화제로 소비되고 잊힐 것이다. 하지만 한돈산업이 그 식탁에서 챙겨야 할 것은 환호가 아니라 질문이다. 삼겹살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는 사실에 박수만 치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 삼겹살의 상당량이 수입이라는 현실, 한돈이 자기 잔치에서 익명으로 남아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음식은 박수받는데 산업은 위태로운 이 분리를 다시 붙이는 일이 우리의 숙제다.
생각해 보면 그날 식탁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도, HBM 칩스도 아니었다. 불판 위에서 지글거린 삼겹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도, 그 반도체를 사 가는 사람도, 결국 그 삼겹살 한 점 앞에 둘러앉아 마음을 열었다. 그 한 점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대신해 손님을 맞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 한 점이 어느 돼지였는지를 묻는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언젠가 또 다른 글로벌 거물이 한국에 와서 삼겹살을 구울 것이다. 그때는 누군가가 물어 주기를 바란다. “이 삼겹살, 한돈입니까?” 그리고 식당 주인이든 총수든 누구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이죠. 한돈입니다.” 그 한마디가 자연스러워지는 날 비로소 삼겹살의 국격은 한돈의 국격이 된다. 음식과 돼지가 다시 하나가 된다. 그날까지 한돈이 해야 할 일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소비자의 입에 올리는 것이다. 불판은 지글거렸고, 온 나라가 그 앞에 모였다. 이제 그 불판 위 고기의 이름을 되찾아 올 차례다.

월간 한돈미디어 2026년 7월호 101~108p






















